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장 17~18절)
서문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최초의 교회 회의는 모세의 율법과 믿는 자와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점이 그 동기가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제1차 전도 여행에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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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지키지 않고 은혜로만 구원받은 이방인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그곳에 있는 율법주의적인 유대인의 무리들은 구원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율법주의자들은 안디옥에 가서 믿는 자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사도행전 15장 1절)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 측과 율법을 전하는 무리 사이에 커다란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과연 소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의사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사도행전 15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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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른바 '은혜파'와 '율법파' 사이에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처음으로 그의 경험을 증거 했는데, 그는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9)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방 사람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던 일을 고했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유대인인 자신도 멜 수 없는 멍에라고 하면서(행 15:10) 그 사건에 대해 결론을 내렸습니다.
"...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
(사도행전 15장 1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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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예수님이 천국에 계시는 동안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그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신다면, 왕국과 지상에서의 메시아 통치에 관한 성경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모든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올 것이며, 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방인의 속박의 멍에에서 구원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실 것이며, 이스라엘은 한 국가를 이룩하여 그들이 다시 찾은 영토에서 살 것을 분명히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 모든 예언들이 땅에 떨어졌단 말입니까? 우리는 이것은 영적으로 해석하여 현 교회에 적용해야 한단 말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한 몸, 즉 교회를 선택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신다는 말입니까?
이런 문제들 역시 해답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때에 맞게 야고보가 등장했습니다.
야고보가 설명한 것은 매우 간단한 기본적인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 학자들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야고보는 이스라엘에서 주신 왕국에 관한 약속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나 지금 현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했습니다. 즉 첫째로, 예수님은 그 당시까지도 하나의 신비로 남아있던 그의 계획의 일부를 이루어 나가시는 중이며, 그다음에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왕국을 실현시키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사도행전 15장 14절)
그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왕국에 관한 것은 잠깐 보류하시고 지금은 그의 이름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한 백성을 이방인 중에서 불러내시고 계십니다."
야고보가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왕국과 관련된 예언과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 기록된 바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
(사도행전 15장 15~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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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들에게 제시된 문제의 해답이 나왔습니다.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 왕국의 율법 아래 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은혜의 시대의 성도들이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에 대해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사도행전 15장 19~20절)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말이나 할례에 대한 말은 하나도 없고 다만 세 가지, 즉 우상 숭배와 음행과 피를 먹는 것을 피하라고 충고합니다.
이 세 가지 일에 대한 금기는 율법적 근거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은혜의 근거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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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바울과 바나바 일행 편에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믿는 자들(특히 이방인 성도들)이 모세의 율법 아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서였습니다. 여기 예루살렘 장로들이 안디옥에 보낸 편지의 사본이 있습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라는)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사도행전 15장 24절, 괄호 안의 구절은 영어 성경에는 있으나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다 - 역자 주)
다시 한번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주의자들이, 안디옥에 있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써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결정됐나 봅시다. '우리의 지시도 없이' 그들 마음대로 주장한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행 15:24).
이방인 성도를 율법 아래 있으라고 가르친 그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런 것을 시키지 않았다.'라고 사도와 장로들이 안디옥 교회에 편지했습니다. 율법주의적 안식일 수호자(sabbatarian)들은 권위가 부여되지 않은 자들이었으므로, '우리의 지시도 없이' 주장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안디옥 교회에 주어진 메시지였으니 곧 '이방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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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온 오류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반(反)율법주의, 갈라디아주의 입니다.
첫째로, 율법주의는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이 오류에 대한 대답이 바로 바울 사도의 '로마서'입니다. 둘째 오류는 첫째 것의 정반대로, 모든 것이 은혜이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든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이 오류에 대한 답변은 '야고보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셋째 오류인 갈라디아주의는 가장 사특한 것으로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그 구원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 오류를 갈라디아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사상이 갈라디아 교회에 창궐했기 때문입니다. 이 오류를 반증하기 위해 바울이 쓴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이 세 가지 오류는 현재 우리 가운데도 있습니다. 비록 최초의 교회 회의에서 이 문제가 명확하게 규정되었으며 서신서에도 해설되어 있지만, 이 오류들은 계속 주장되어 왔습니다. 주님이 율법의 두려움과 속박으로부터 귀중한 영혼들을 인도해 내셔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유로 이끌어 들이시는 데에 본서의 각 장을 사용하시고 이를 널리 전파해 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라는 말씀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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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죄를 드러내는 율법
믿는 자가 율법 아래 있는가? 이 문제는 바울 당시에 이미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대답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열심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 아래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잘 지켜야 하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16절)
또 어떤 사람은 은혜로 구원을 받기는 하지만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장 10절)
만일 우리의 구원이 율법으로 보존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율법적인 행위는 가장 완전하게 그리고 한 번도 실수하는 일 없이 계속되어야 하는데,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에 대해서 앞으로 계속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 질문은 다름이 아니라 "율법의 선함이 무엇인가? 왜 율법을 주셨는가? 율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또 믿는 자를 보존하거나 사람을 더 선하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직 사람을 정죄할 뿐이라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바울이 미리 알고 기록한 질문과 같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갈라디아서 3장 19절)
그 대답은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죄를 하나님께 대한 범법이라고 들춰내기 위해서 그 무엇에 더하여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으므로 율법을 어긴 것(범법)이라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로마서 4장 13~15절)
"율법이 없는 곳에 범법도 없느니라."라고 하신 이 말씀에는 조금도 애매한 데가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으며 그 죄의 값은 사망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로마서 5장 12~13절)
죄의 본질이 진정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죄'는 세 가지로 표현되는데 가장 흔한 것은 하타(hattah)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과녁을 벗어나다.'입니다. 하나님은 한 과녁을 설정해 놓으시고 사람으로 쏘아 맞추게 하셨습니다. 만일 잘못 쏘아 그 과녁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다 틀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바로 그 과녁을 잘못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과녁이 곧 율법입니다.
이 요구는 절대적입니다. 완전한 복종, 즉 계속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야고보서 2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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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거의 완전하게'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계명을 다 지키다 한 계명만 빠뜨려도 안 되고, 전 생애를 바쳐 율법을 지켜 오다가 한순간의 실수로 이를 범해도 곧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완전한 명중을 요하는 과녁의 중심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란 하나님의 이러한 완전한 요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라는 말의 두 번째 히브리어 단어로는 아본(Avon)이 있는데 그 뜻은 '결함' 또는 '반칙'입니다. 그것은 곧은 선으로부터의 탈선을 뜻하며 구부러졌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히 곧은 선 위를 걷기를 요구합니다.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면 곧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곧은 선, 즉 율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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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라는 말의 세 번째 히브리어 단어로는 페샤(pesha)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은 '법을 어김', 즉 금지된 땅에 침범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계선을 넘어선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거룩함과 완전함이라는 경계선을 쳐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길가에 '군사 보호 구역, 접근을 금함'이라고 표시해 놓고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울타리나 알아보기 쉬운 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이를 침범하고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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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주심으로써 분명한 울타리를 쳐 놓으셨습니다. 그 율법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으므로 이것을 넘어서는 것을 죄라고 규정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지만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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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은 죄를 억제할 수는 있으나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지는 못합니다. 법을 어겼을 때 가해지는 처벌이 엄해지면 그로 인해 약간 억제되며 감소하기는 하지만 죄를 짓고 싶은 욕망 자체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만일 감금당하거나 고소당하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사로 법을 어길 것입니다. 주류 판매 금지령은 술을 만들고 파는 일을 금지할 수 있을지 모르나, 술에 대한 사람의 욕구를 없애거나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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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든 일은 법이 선하지 못하거나 옳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범죄를 막기 위해 억제하고 구속하는 법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법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법으로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성이 가득한 인간의 마음을 개선하는 일에서 법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법이 선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어떠한 법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 말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장 3~4절)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이라는 말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흠 없고 완전하게 그리고 일생 동안 쉼 없이 율법을 지켜 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완전함과 거룩함 그리고 율법의 준수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죽음의 선고 아래 놓여 있습니다. 다윗은 말했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편 5절)
솔로몬도 말했습니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열왕기상 8장 46절)
다윗은 시편 14편에 이렇게 썼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편 14편 2절)
인생들을 내려다보신 하나님은 무엇을 발견하셨겠습니까?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편 3절)
하나님은 사람이 아무도 그의 선행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며,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은혜뿐입니다.
당신이 만일 구원받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자신이 전적으로 죄로 물들어 있다는 것과,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전혀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그다음 자기 스스로 구원해 보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당신 자신을 맡겨 버리십시오.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이 없고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바로 여기에 당신의 희망이 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찬송가 494장
제5장 율법에서 건져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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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로마서 7장 10절)
바울은 구원받으려고 그렇게 애써 지켜 온 율법이 그의 사형 집행자가 되었고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에게 생명을 주는 대신 그를 '죽였다.'라는 것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로마서 7장 11절)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은 감히 사람이 지킬 수 없는 높은 수준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로마서 7장 12절)
율법의 목적은 죄의 무서운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데 있었습니다. 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죄의 참 본성을 드러낸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로마서 7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7장 13절)
마지막 구절을 주의해 보십시오.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있기 전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알 수 없었다고 주장했을지 모르나, 일단 율법이 온 다음에는 자기 의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로마서 5장 20절)
그러므로 율법은 죄인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거울이 없으면 사람은 자기의 참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울이 할 수 있는 일은 보여 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거울은 얼굴의 더러운 것을 보여 주고 씻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 주기는 하지만, 그 더러움을 씻어 주지는 못합니다. 거울을 가지고 얼굴을 문질러 보십시오. 오히려 더러운 것이 얼굴 전체에 묻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거울이 아닌 물과 비누로 씻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율법의 사명은, 인간의 참모습을 보여 주며 씻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 줄 뿐이지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죄를 참으로 회개하고 고백하여 말씀의 물로 씻음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고 또 앞으로도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율법은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필요성을 알려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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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동안 이스라엘은 이처럼 율법 아래 살아왔지만, 그동안 단 한 사람도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구원 얻은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실 때 계명들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장막의 모형과 피 뿌려 제사하는 규례도 아울러 주셨습니다. 이 제사와 장막은 곧 오실 구속자를 가리킵니다. 만일 하나님이 피의 제사와 장막의 모형을 함께 주시지 않고 거룩한 율법만 내려주셨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갈보리로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모든 소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어 주십니다.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다만 자신의 부족을 자백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만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로마서 10장 4절)
보십시오.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마치 율법을 완전히 지켜 의를 얻는 것으로 여겨 주어서 율법은 끝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율법의 위협이나 그 처벌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갈2:19)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며 율법에서 구원 얻은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아, 기쁘다.
예수 죽으심은 속죄하기 위함이라.
율법으로 정죄받아 멸망받은 우리를
주님이 구원하심 단번에 이루었다.
단번에 이루었다, 죄인들아, 영접하라.
단번에 이루었다, 의심 말고 믿어라.
십자가를 바라보라, 너의 짐 벗겨진다.
주님이 구원하심 단번에 이루었다.
블리스(P. P. Bliss)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율법의 요구에 대해 그 값을 치르시고 믿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를 나누어 주셨으며 우리 안에서 성취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오늘날에도 죄의 본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로 죄가 무엇이며 죄가 저질러 놓은 일을 보기 위해서 과연 율법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율법은 여전히 죄인을 정죄하기 위해 버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참모습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가 아니라 갈보리산에서 입니다. 율법이 우레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래 1,600년이 지나는 동안 이를 완전히 지킨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 박고 율법을 어긴 죄인 취급을 하여 죽였던 것입니다. 분명히 보십시오. 수 세기 동안 율법 아래 살아왔던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죄 중의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까?
죄가 무엇인지 진정 알기 원한다면, 이제 나와 함께 시내산이 아니라 갈보리 동산으로 가 봅시다. 그곳에서 완전하시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죄의 참 본성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를 통해서 죄가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갈보리의 그 장소로 가십시오. 바로 당신의 죄가 당신의 구주를 십자가에서 어떻게 했는지를 보기 전에는, 당신은 결코 진정한 회개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매 주일 십계명을 외우는 교회에서 태어나 그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그 계명은 나에게 정죄와 심판을 말해 주었을 뿐 내 마음을 변화시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갈보리 동산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십자가상의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31년 동안 율법의 위협과 대결해 왔던 돌같이 굳어진 나의 마음이 스르륵 녹고 말았습니다. 율법이 우레 치는 시내산의 그늘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갈보리산에서 순식간에 해결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당신 자신의 노력을 그치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범한 죄인임을 자백하고, 당신 대신 갈보리에서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로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놀라운 평화를 찾으십시오.
나무에 달려 고통 속에서 피 흘리신
그를 내가 봅니다.
내가 십자가에 가까이 섰을 때,
주님은 그 사랑스런 눈길을
내게로 향하셨습니다.
존 뉴턴(John New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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