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구원 계획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지혜롭고, 얼마나 위대하며
얼마나 묵상하기에 한이 없는지.
그분은 나의 타락한 상태를 보셨으나
이 믿음 없고 타락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네.
1. 은혜의 교리
은혜의 교리라는 말은 16세기말에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신학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로 연결된 다섯 가지의 뚜렷한 성경적 가르침을 줄여서 표현한 말이다. 이 신학은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와 관련이 있었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유로우며 그 결과 자기 결정적인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고 이로 인해 논리적 과정에 따라 존 칼빈(1509~1564)의 엄격한 예정교리, 특별히 예수님이 오직 택함 받은 이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가르침을 부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신학적 일탈에 대응하기 위해 도르트총회(1618~1619)가 소집되었고 거기서 오늘날 튤립(TULIP)또는 "칼빈주의 5대 강령"으로 알려진 다섯 가지 은혜의 교리에 대한 고전적 요약이 담긴 도르트 총회 신경이 나왔다.
튤립(TULIP)이란 일종의 약어로 이 단어의 각 철자는 가장 논쟁거리가 된 교리들, 즉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ve of Saints)을 뜻한다. 이것이 이 교리들에 대해 가장 현명하거나 가장 정확하게 말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고 약어는 이 교리들을 기억하는 데 편리한 수단이다. 이 교리들은 인간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될 수 있는 어떤 영적인 선에서도 확신을 거두어 가고 그 대신 오직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만 확신을 두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교리들은 칼빈주의의 가장 순수한 표현을 이루지만 칼빈이 이 교리들을 고안해 낸 것도 아니고 이 교리들이 종교개혁 시대에 그의 사상만의 특징도 아니었다. 이러한 진리들은 구약의 시편에 담겨 있다. 이 진리들은 요한복음 6장과 10장 및 다른 곳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심지어 대적들에게까지 가르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에베소서와 그 밖의 다른 편지에서 이 진리를 확증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펠라기우스의 부정에 대항해서 똑같은 진리를 옹호했다. (중요한 여러 측면에서 칼빈이 루터파였던 것처럼)
마르틴 루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칼빈주의자였다. 울리히 츠빙글리와 윌리엄 틴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이 신학을 "칼빈주의"보다는 "종교개혁 신학"으로 기술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청교도들 가운데는 토머스 카트라이트, 리처드 십스, 존 오웬, 존 번연, 매튜 헨리, 토머스 보스턴 등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의 후예들도 있었다. 미국에서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조나단 에드워즈, 코튼 매더, 조지 휫필드 등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들은 모두 칼빈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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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칼빈주의로 알려진 교리들은 교회 역사에서 뒤늦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러 시대에 교회 곳곳에서 보존되어 왔고 가장 위대한 신앙과 팽창의 시기에 언제나 교회의 특징이 되어 온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 복음주의 교회는 이런 진리들이 널리 두려움 없이 선포될 때 다시 위대한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 교리들, 즉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또는 이 책에서 말하듯이 근본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특별한 구속, 효력있는 은혜, 보존의 은혜) 같은 교리의 회복보다 오늘날 더 시급한 것은 없다. 이 은혜로운 교리들은 교회의 황금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두드러졌다.
2. 칼빈주의 5대 강령
1. 근본적 타락 (전적 타락)
나는 이전에 패역하고 죄로 더럽혀져
마귀의 어둔 길을 따라갔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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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요점은 그보다는 더 의미심장하다. 이 장에서 우리는 죄의 본질과 범위를 다루며, 요는 우리가 하나님이 먼저 개입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만큼 모두 근본적으로 죄에 깊이 물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창세기 6장에서 벌써 이런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세기 6장5절)
마음이 오로지 악에만 기울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찾을 수도 없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썼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장 9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요한복음 6장 44절)
바울은 유명한 시편 두 편(시 14:1~3, 53:1~3)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장 10절~12절)
이 가르침이 일반적으로 '전적 타락'이라고 불리는 유명한 '칼빈주의 5대 강령' 가운데 첫 번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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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은 세상이 생겨나기도 전에
은혜로운 계획에 따라 나를 미리 아시고
내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삶과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닮도록 예정하셨네.
아, 영광스런 작정이여.
누구든 보통은 자신의 성경 신학을 선택 교리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교리로 유명한 존 칼빈조차도 4부로 구성된 자신의 조직 신학의 세 번째 책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이 교리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지적해 왔다. 칼빈은 성경 신학자로 출발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가르쳤다. 그 뒤에야 그는 이 문제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로 되돌아와 한 편으로는 구원이 영원 전에 자신을 위해 한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다른 한 편으로는 구원이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 보존에 의해 영원한 미래까지 지속될 것임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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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본문
성경 곳곳에는 선택에 대해 다루는 무수한 본문들이 있으며 그중에 일부 본문은 우리의 논의의 과정에서 언급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제를 성경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다룬 본문은 로마서 9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강론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 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로마서 9장 6절~18절)
이 본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 중에 하나여서 심지어 예언과 종말의 시대를 다루고 있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난해한 대목들보다도 더 어렵다. 그러나 이 장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 장이 선택을 다루고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이 장이 서로 관련된 두 가지 문제도 함께 다룬다는 점이다. 첫째는 선택의 부정적 측면, 즉 유기(유기란 하나님이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 받지 못한 이들을 버려두시는 것을 가리킨다.)의 교리이며, 둘째는 어떤 이들은 선택하시고 어떤 이들은 버려두셔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문제를 일컫는 고유한 명칭이 신정론이다. '신정론(theodicy)'이라는 말은 두 헬라어 단어, 즉 '하나님'을 뜻하는 말인 테오스(theos)와 '정당한' 내지 '옳은'이라는 뜻의 디케이(dikiei)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신정론이란 하나님의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려는 시도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떤 이는 선택하시고 어떤 이는 선택하지 않으시는 것이 과연 의롭고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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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기초
로마서 9장이 선택이라는 주제를 가장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선택 교리를 가르치는 성경 본문은 무수히 많다. 아마 그런 본문들이 수백 개는 될 것이므로 우리가 그 모든 구절을 다 논의할 수도 없고 심지어 열거하기도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본문 몇 가지만 언급하는 것은 나름대로 유익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 하셨나니
(신명기 7장 7~8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요한복음 15장 16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성된 자는 다 믿더라
(사도행전 13장 48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11장 5~6절)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로마서 11장 7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장 4~6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9절)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
유기 : 어려운 교리
이제는 우리가 유기라는 어려운 교리, 즉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하셔서 다른 이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작정하시는 것과 유사하지만 상반되는 방식으로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신다는 가르침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이 교리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이 교리가 두 구약 성경 인용구, 즉 말라기 1장 2~3절(13절에 인용된 것과 같이,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말씀)과 출애굽기 9장 16절(17절에 인용된 것과 같이,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의해 로마서 9장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절)라고 결론지음으로써 이 본문에서의 가르침을 요약한다.
출발점은 우리가 가질 만한 어떤 질문과도 무관한 유기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유기에 대해서도 선택에 대해 밟은 절차와 똑같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 많은 본문들이 유기에 대해 가르친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잠언 16장 4절)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요한복음 12장 39~40절)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3장 18절)
내가 그들[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 12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예수 그리스도]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2장 7~8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유다서 4절)
이 본문들(그리고 그 밖의 본문들)은 각기 하나님이 어떤 이들은 그냥 지나치시며 그들을 구원이 아닌 멸망에 이르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은 아주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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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한 교리
유기의 교리가 겉보기와 마찬가지로 어렵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이 교리에 대해 말해야 하는가?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성경 자체가 이 교리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는 그런 하나님은 결코 사랑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일차적인 대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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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기의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음을 확신시켜 준다.
이 교리의 첫 번째 유익은 바울이 로마서 9장에서 관심을 기울인 바로 그 문제, 즉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좌절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는 일이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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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기의 교리는 우리가 배교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모두 한때는 믿은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이것은 아주 곤혹스런 현상이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셨음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계속 불신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유기의 교리는 구원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며 인간의 어떤 공로도 구원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구원하셔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격이나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실제 상황이 아니다.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택함 받은 이들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다. 이것이 로마서에 있는 이 중요한 본문의 주된 가르침이다.
4. 유기의 교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빚을 지고 있거나 어떤 일을 반드시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을 제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축소시키게 된다. 선택과 유기의 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둘러싸고 보호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주권적인 분임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우주에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신다. 하나님은 택함 받은 이들의 구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버림받은 이들의 멸망에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둘 다 하나님의 신적인 주권을 보여 주기 때문에 둘 다 영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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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특별 구속 (제한 속죄)
그분이 갈보리의 나무 위에서 내 죄를 지셨고
의가 내게 베풀어졌네.
내가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시고 해방하셨으니
나는 곧 영화롭게 될 것이라.
이 은혜 얼마나 놀라운지.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이 질문은 오늘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별달리 깊이 숙고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쉽게 대답할 질문이다. "그야 물론 온 세상을 위해서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맞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수님이 택함 받은 이들만을 위해 죽으셨으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범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그 본질과 성격과 효과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제한 속죄'의 개념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 생소하고 이 말을 들어본 이들에게조차 너무 많은 오해를 받고 있어서 더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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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논쟁은 사실 말에 대한 논쟁이 아니다. 논쟁은 복음의 교리들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선택의 교리가 확증하는 대로 만일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인류의 일부는 구원하시되 다른 일부는 구원하지 않기로 계획하셨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어 실제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이들을 위해 죽게 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아들을 보내어 구원하지 않기로 미리 작정하신 이들을 위해 죽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인류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는 분명히 유익이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 역사의 흐름 속에 하나의 윤리 체계를 가져왔고 비 기독교인들조차 거기서 유익을 얻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 사역과 관련해서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특별히 성부께서 그분에게 주신 사람들을 구원하시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의미한다.
소수파의 입장
우리가 특별 구속에 대해 말할 때는 교회 역사에서 늘 사정이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기독교권 내에서는 개혁주의 사상가들이 소수파의 입장을 차지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교리가 성경적이라고 믿지만 오늘날 교회의 다수파는 이 문제를 다르게 본다는 점을 인정한다.
특별 구속과 반대되는 견해를 보편 구속이며 유식한 로마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 정교회 또는 러시아 정교회 교파의 박식한 신자나 심지어 정통 루터파 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에게 보편 속죄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보편 속죄가 자신들이 믿는 바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많은 장로교인과 개혁주의자들조차 자신들의 신앙 고백적 기준으로 보면 이 점에 있어서 자신들의 입장이 지지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만일 실제로 그 죽음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의 유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은 그들의 불신 내지 믿음 부족이라고 믿는다. 개혁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는 이들은 예수님이 선택된 숫자의 사람들, 성부께서 특별히 예수님께 주신 이들을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의 속죄는 그들의 구원을 이루었으며 그러므로 이 모든 이들은 확실히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먼저 의견일치가 있는 몇 가지 점을 강조하면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혀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1. 예수님의 속죄의 가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칼빈주의자들은 때로는 지혜롭지 못하게 "제한 속죄"에 대해 말할 때 예수님의 속죄가 무언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는 부적합한 것 같은 암시를 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개혁주의자들이 믿는 바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죽음의 가치는 너무 커서 - 사실 무한해서 - 이 세상의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점을 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어떤 면에서도 제한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한한 가치를 갖는다.
2. 우리는 구원에는 못 미치는 유익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유익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한 유익 중에 일부는 일시적인 본질을 지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신학자들이 일반 은혜라고 부르는 것을 쏟아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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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그렇지 않을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다.
물론 일부 보편 구원론자도 있다. 사실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점점 더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는 않으며 지옥은 실재하는 곳이고 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이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는 신앙 고백에 있어서 일치한다.
...
앞에서 언급한 각 영역에서 개혁주의자들은 다른 복음주의적인 신학적 교파에 속한 이들과 본질적으로 의견이 같다.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속죄는 어떤 식으로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모든 사람은 결국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진정한 보편 구원론자가 아니라면 필연적으로 속죄를 한정할 수밖에 없다. 속죄는 그 효과에 있어서 제한적이거나(그리스도는 모두를 위해 죽으셨지만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아니면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적이다(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죽으신 것은 아니지만 그분이 위해서 죽으신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을 설명하는 너무나 많은 유익한 책을 쓴 로레인 뵈트너는 이 상황을 두 개의 다리에 비유한다.
하나는 매우 폭이 넓은 다리지만 협곡을 절반만 가로지른다.
다른 하나는 폭이 좁은 다리지만 협곡을 끝까지 가로지른다.
상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누구든 실제로 협곡을 가로지르는 좁은 다리를 건너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십자가의 좁은 길은 구원에 이르는 내내 펼쳐져 있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다.
찰스 스펄전은 이 논증을 한 단계 더 진척시켜 특별 구속을 부정하는 이들은 실제로 속죄를 제한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스펄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속죄하신 것은 아니며 그렇지 않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속죄를 제한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오히려 우리의 논적들이 속죄를 제한하지 우리는 속죄를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죽으셨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체적으로 누군가의 확보하기 위해 죽으셨습니까? 그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그들이 일관성이 있다면 그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 ~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죽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구원의 특정한 조건을 열거합니다. 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한하는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어느 누구의 구원을 확실하게 얻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당신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한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제한하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능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무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얻으시기 위해 죽으셨으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원을 받으며, 반드시 구원을 받으며, 만에 하나라도 결코 구원받지 못할 위험을 겪을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속죄에 대해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런 생각을 계속 가져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당신의 견해 때문에 우리의 견해를 철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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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불신
성경이 명확한 구속 내지 특별 구속을 가르친다는 관점을 회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나마 이마저도 자세히 살펴보면 참된 가능성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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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직 택함 받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입장 외에 다른 입장은 없다. 물론, 성경에서도 그와 같이 가르치고 있다. 대표적인 본문 몇 가지만 들자면 다음과 같다.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이사야서 53장 8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태복음 1장 21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의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장 28절)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누가복음 1장 68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장 1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장 1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요한복음 17장 1~2, 9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라디아서 3장 13절)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에베소서 5장 25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장 28~32절)
이 마지막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이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도록 선택하신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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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효력있는 은혜 (불가항력적인 은혜)
그러나 긍휼과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내 영혼을 무덤 속에 남겨 두지 않으시고
내게 생명을 주셨으니 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위로부터 거듭나 구원을 받았다네.
무조건적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다. 특별 구속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3위이신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유익을 예수님이 구속하신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일은 성령의 효력 있는 은혜의 사역이다. '튤립'이라는 약어를 따르면, 이것이 바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불리는 교리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부르시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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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부르심의 은혜는 압도적으로 효력 있다. 이 사실을 표현하는 좋은 방법은 성령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새 본성을 주셔서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럽게 새 본성이 행하는 대로 행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복음을 믿고 우리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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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는 효력 있는 은혜의 교리를 매우 효과적인 언어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렇게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효과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었으므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는 것이다 (10장 1절).
두 종류의 부르심
1. 일반적 부르심
성경에는 두 종류의 부르심이 나온다. 첫 번째 부르심은 외적이고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다. 이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향해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라는 초청이다. 이 부르심은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라고 말씀하시면서 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라고 말씀하시면서 부르신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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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적이고 보편적이며 (그 자체로는) 효력 없는 부르심이 지닌 난점은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면 아무도 실제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 심지어 복음의 핵심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부르심을 발하시는 하나님을 별로 탐탁하지 않게 여겨 하나님에게서 돌아선다.
예수님은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손님을 초대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잔치가 준비되자 그는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하며 초대했다. 그러자 손님들은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밭은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눅 14:15~24).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신 것이 아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실제로 그렇게 반응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초대를 거부하고 자기 길로 가기를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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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바른 길로 걸어가 예수님께 응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그 빛을 싫어하여 꺼 버리려 했다. 그들은 그 등대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요한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벌어지는 일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정죄의 말을 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19)
2. 구체적인 부르심
두 번째 종류의 부르심은 내적이고 구체적이며 효력 있는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은 사람을 초대할 뿐만 아니라 그 초대에 반응할 수 있는 의지 또는 능력도 제공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부르심이 없으면 영적으로 영원히 죽은 상태로 남아 있을 이들을 영적인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경우다.
죽은 죄인을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아마도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된 나사로가 되살아난 사건일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이 지나 시체가 이미 썩어가고 있다는 말을 들으셨다. 마르다는 이렇게 말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39절). 죄 때문에 도덕적, 영적으로 부패해 있는 우리의 상태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광경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 가망 없는 상태가 된 나사로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소망은 없었다. 그의 상황은 심각하거나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전혀 아무 소망이 없는 상태였다. 18세기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 조지 횟필드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며 죄인이 처한 상황은 전혀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부패한 영적 상태에 있는 우리는 냄새가 나서 하나님께 악취를 풍긴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가? 인간에게는 그렇다. 그러나 모든 일이 가능하신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마 19:26). 예수님은 기도하신 뒤,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부르셨다(요 11:43). 그러자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 죽은 사람을 소생시켰다.
성령께서 오늘날 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성령님은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미리 구원하기로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위하여 죽으신 이들을 믿음으로 부르시기 위해 역사하신다. 그러한 세 가지 활동 -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행동, 속죄하시는 예수님의 사역, 부르시는 성령의 능력 - 을 떠나서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소망이 없을 것이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활동 때문에 -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때문에 -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장 악한 반역자들조차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구주께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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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성경에서 부르심을 뜻하는 말은 구원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 거의 일률적으로 복음의 보편적 부르심이 아닌 인간을 구원의 상태로 인도하며 따라서 효력 있는 부르심에 적용된다. 그런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은혜의 무차별적인 제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는 예는 거의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로마서 1장 6~7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장 2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 1장 9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에베소서 4장 1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장 8~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베드로후서 1장 10절)
이러한 각각의 본문(및 그 밖의 여러 본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그 부르심을 받는 이들을 효력있게 구원한다. 위의 본문들을 종합하면 그 부르심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우리를 그분과의 교제로 인도하고 우리가 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확실히 살게 될 거룩한 삶을 우리 앞에 제시하는 부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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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의 뒷부분에 소개될 주제들을 예고하는 효력 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지와 예정이 시간 속으로 들어와 부르심 받는 사람이 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도받고 그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으며 최종적인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되는 과정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중요한 세 가지 보충 설명
그러나 '부르심'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심각한 오해가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부르심에 대해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보충해 주는 세 가지 중요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1. 두 가지 반응
일반적인 부르심이 지닌 난점은 사람들이 이 부르심에 자연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으라는 일반적인 부르심에는 반응하지 않지만 종교적인 집회에서 앞으로 나오거나 신앙을 고백하거나 심지어 교회에 가입하는 등의 외적인 행동으로 반응을 보일 수는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반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실제로 그렇게 한다. 베드로가 겉으로 신자처럼 보이는 이들에게 "너희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벧후 1:10). 베드로가 말하려 했던 것은 우리가 단순히 설교자에게만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서 참으로 거듭났음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7년부터 1960년까지 제10 장로교회 목사를 역임한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는 이렇게 썼다.
만일 사람들이 외적인 부르심 이상으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내적인 부르심이 들린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일원이 된다. 첫 번째 부르심은 우리를 단지 신앙 고백자들의 집단에만 연합시킨다. 그러나 내적인 부르심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며 거듭난 모든 이들과 연합시킨다. 외적인 부르심이 진리에 대한 어떤 지적인 앎을 동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적인 부르심은 우리에게 마음의 믿음, 우리를 영원히 그리스도께 묶어 두는 소망,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께로 반드시 우리를 이끌어 가는 사랑을 가져다준다. 전자는 형식주의로 끝날 수 있지만 후자는 참된 생명으로 끝난다. 외적인 부르심은 옛 본성의 성향에 재갈을 물리고 영혼을 외적인 도덕 안에서 지켜 줄지도 모르지만 내적인 부르심을 우리 안에 있는 병을 치유하고 계속해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승리로 인도할 것이다
2. 일반적 부르심의 중요성
지금까지 말한 모든 내용은 하나님이 각 사람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특별한 또는 내적인 부르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도 일반적인 부르심에만 기초하여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부르심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나님은 바로 일반적인 또는 보편적인 부르심을 통해 구체적으로 각 사람을 부르시기 때문이다.
효력 있는 부르심 내지 구체적인 부르심은 일반적 부르심을 통해 나온다. 다시 말해, 효력 있는 부르심은 복음 전도자들과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곳저곳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죄인들을 부르신다는 복음의 좋은 소식을 말해 줌으로써 전달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복음의 씨앗을 넓게 뿌리지만 그중에 일부는 옥토에 떨어지는 것처럼 일부는 자갈밭이나 얕은 흙에 떨어지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이 씨 뿌리는 일에 복을 주셔서 씨가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 자랄 때 그 결과는 영적인 수확이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로마서 8장에 요약된 - 예지, 예정, 소명, 칭의, 영화를 포함한 -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황금 사슬 속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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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사람들을 부르시지만 사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효력 있게 부르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3. 나는 선택을 받았는가?
때때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에 빠진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셔서 구원하신다면 그냥 그렇게 하시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또는 자신이 선택받은 백성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일에 매달린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받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선택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내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 이 질문은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을 괴롭혔고 그에게 극도의 근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처럼 지나치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지나치게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당신이 선택받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그 답은, 당신이 복음에 반응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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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선택받은 백성에 속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엿보려 애쓰며 하나님의 신적인 예지와 예정의 책의 포장지를 벗겨 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선택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복음에 반응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신은 하나님이 선택의 사랑을 당신에게 베푸셨으며 당신을 이미 사랑하셨으므로 끝까지 당신을 계속 사랑하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신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았으며(엡1:4) 당신이 구원의 확실을 위해 바라보아야 할 분도 바로 그리스도다.
5. 견인의 은혜 (성도의 견인)
나를 온전하게 만드시고
하늘의 두루마리에 내 이름을 쓰신 하나님에게서
무엇이 내 영혼을 끊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그럴 수 없네. 할렐루야!
내 주님을 미워하는 자들이 가져오는
환난이나 고난이나 위험이나 칼이?
여기서 도살을 당하는 것이? 아무 보상도 없는 것이?
아무것도 그럴 수 없네. 할렐루야!
견인은 영원한 안전이라고도 불린다. 즉 어떤 이들이 구어체로 말하듯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 - 하나님께 영원 전부터 미리 아신 바 되고 믿도록 예정되어 이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고 거듭나고 의롭게 되었으며 궁극적인 영화에 이르는 길이 너무나 확고해서 심지어 이 궁극의 영화를 과거 제시로 말해도 되는 이들 - 은 결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은 진리다. 견인은 우리가 살펴본 다른 교리들 각각에 내포되어 있으며 구원이 영원히 자비로우시고 전적으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사실의 논리적 귀결이다.
몇 가지 일반적인 오해
1. 견인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영적인 위험을 면제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훨씬 더 큰 위험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므로 세상과 마귀가 끈질기게 그들을 대적할 것이고 그들은 파멸시키려 할 - 그리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들을 파멸시킬 -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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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환난,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등을 언급하면서 끝으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롬 8:36, 시 44:22 인용)
견인 교리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 영적인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2. 견인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짓는다. 노아는 술에 취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에 대해 거짓말을 하며 자기 목숨을 부지할 생각으로 그녀가 자기 아내가 누이라고 주장했다. 다윗은 간음을 저지른 뒤,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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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들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원히 실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견인의 의미라고 결론짓게 된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하셨지만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2)
로레인 뵈트너는 택함 받은 성도들도 세상에 속고 자신의 부패한 욕구에 이끌려 헤맨다는 점에서 종종 탕자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성도들도 잘못된 생활에 자신의 물질을 낭비한다. 그들도 만족을 주지 않는 세상의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운다. 그러나 그들은 조만간 제정신이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 15:17~18) 그들은 돌아가서 자비로운 아버지에게 즐거운 환대를 받는다. 뵈트너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이야기는 그 탕자가 아들이고 그래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철저하게 칼빈주의적인 비유다. 아들이 아닌 사람들은 결코 일어나 아버지께 가려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3. 견인은 실제로 거듭나지도 않고 단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기만 하는 사람들도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어떤 참된 믿음에 대한 지식이나 어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험 내지 성품도 결여된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종교에 대해 많이 알고 심지어 가장 엄격한 교회 정교인 자격시험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식은 그 사람이 실제로 구원을 받았다는 보증이 전혀 아니며 교회의 정교인 자격도 아무런 보증이 못 되긴 마찬가지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종교적 신앙 고백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견인 교리가 자신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슬픈 진실은 성경에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벧후 1:10) 하는 일에 부지런히 집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경고들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런 여러 경고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말씀은 가장 직접적인 경고에 속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우리가 굳게 설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굳게서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사실 신자들의 최종적 견인은 우리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고 참으로 거듭났다는 유일한 궁극적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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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인과 관련된 여러 성구들
오늘날의 많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기본적인 신학과는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견인을 믿는 한 가지 이유는 이 교리가 받아들이기에 위로가 되는 교리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성경 구절들이 이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성구만 뽑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편 34편 7절)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에레미야서 31장 3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에레미야서 32장 40절)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서 11장 19~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장 24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요한복음 6장 51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장 29절)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린도후서 4장 8~9절, 14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장 14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베드로전서 1장 3~5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한일서 5장 11~13절)
이런 구절들은 어러 군데의 성경에서 인용한 것으로 모두 신자를 믿음으로 부르신 분께서 또한 신자를 그 상태로 끝까지 보존하실 것이라는 명백한 진술들이다. 이는 이중적 안전이다. 성경에서는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시며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듯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붙드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도 끝까지 인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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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인과 관련된 중요한 세 성구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립보서 1장 6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은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장 27~30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5~3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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